[행사 안내] 그럼에도, 별일없이산다

그러니까 11월 28일, “가족다양성 시대, 현행 법령 개선과제” 토론회가 열렸는데 말입니다. 가족구성권연구소가 여성가족부에서 주최하고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주관하는 가족다양성 정책관련 포럼에 참석 요청을 받았는데, 여성가족부가 토론자에게 “동성애와 관련된 내용을 빼라”는 요구를 했고, 연구소는 이를 거절해 포럼 참석을 거부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미 토론문도 제출하고, 행사포스터에 토론자로도 이름을 올렸는데 참석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연구소의 입장은, 페이스북에 소상히 올라와 있습니다. (링크)

이미 대부분의 시민들은 국가가 강요하는 ‘정상가족이데올로기’를 부정하고 대안들을 찾아나선지 오래이다. 동성파트너쉽을 국가가 부정하고 차별하는 사회에서 한부모가족과 다문화가족 등 이미 차별을 경험하고 있는 가족 뿐만 아니라 모든 개인과 가족이 존중받고 평등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감히 선언한다. 다양성은 국가에서 허용하는 한에서 질서를 넓히는 것이 아니다. 가족 다양성은 가족에 대한 차별과 규제에 대항하여 자유롭고 실질적인 가족관계들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것을 통해서 추구되어야 한다. 

<“가족다양성 시대, 현행 법령 개선과제” 토론회에 가족구성권연구소가 불참하는 이유에 대한 입장문> 중에서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편하게 선택할 수 있는 사회 만들기>를 주제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 사례들을 모아 책을 발간하는 <별일없이산다>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자리에 초대합니다.

결혼과 출산, 그 견고한 가족의 조건에 따르지 않고 살더라도 딱히 별일 없다는 사람들, 그렇지만 정말 좀 별일 없이 살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네 ‘별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야기에 함께 하실 분을 기다립니다.

사전신청 (클릭) *신청마감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만들기 위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유쾌하고 따뜻한 이야기로 넘쳐나는, 오롯이 오신 분들이 서로의 삶과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는 자리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날 하루 단순히 유쾌한 시간을 보낸다고 삶 전체가 유쾌해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별일 없이 산다>는 말을 하기가 녹록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우리 각자의 별일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12월 3일, 사전 신청하신 분들을 대상으로 자리가 마련됩니다.

곧 만나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혼인신고가 이렇게 중요한 줄 몰랐어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편안하게 선택할 수 있는 사회 만들기>라는 거대한 주제가 2019년의 내 삶의 무게를 표현해준다는 데에는 검찰의 거짓말 탐지기도 일말의 의심없이 침묵을 지킬 것이라며 이 프로젝트에 대한 큰 부담감을 친구에게 토로했을 때, 친구는 말없이 이 기사를 보내왔다.

“39년 함께 산 남편이 있는데 무연고 장례라니”

2019-10-13 06:00 연합뉴스

잠시 말이 없던 친구는 일단 읽으라고 했다. 그리고 찾으라고 했다.
뭘 찾냐는 말에 다 찾게 되어 있다는 말을 남기고 자러 간 친구를 향해서 나는.

얘는 왜 또 장례식 타령이래, 지금. 결혼제도에 쏟아지는 이야기만 해도 마감을 못하게 생겼는데.

하다가 기사를 탐독하고 말았다.

39년을 같이 살았던 두 사람. 재혼이라 굳이 혼인신고까지는 하지 않고. 그런데 아내가 죽고 나니, 사실혼 관계로 살아온 이 씨는 연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망진단서를 끊을 수도, 장례 절차를 결정할 수도 없단다. 이걸 정해둔 법을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줄여서 장사법이라고 한단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 2조 16항에서 정한 ‘연고자’의 범위(를 내손으로 직접 찾고 있었고)

수소문 끝에 장례를 치를 방법이라고 찾은 것이 무연고 장례라고 했다.

무연고 장례는 가족이 없거나, 가족이 있더라도 시신 인수와 장례 권한을 포기한 사망자에 대해 지자체가 도움을 주어 치르는 장례이다. 일생을 함께 하고도 법에서 규정하는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내는 연고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가족구성권에 대해서 공부하고 다른 사람들과 그 내용을 공유하면서도, 정작 죽음에까지 전통적인 가족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제도적 제약이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죽음 역시 가족구성권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문제이다. 가족을 구성하는 방식과 그에 따른 형태 역시 다양해지고 있는 현실을 법이 제대로, 제때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을 해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으면, 비혼주의자로 삶을 살다보면, 우리는 누구나 높은 비율로 죽음 앞에 무연고자가 될 확률을 가지고 있다.

내가 무연고자라니…

하지만!

부부 간이 아닌 인간 관계에 사랑이 없나? 이성 관계 말고는 연애하는 이가 없나? 비혼주의자에게 정녕 인생 친구가 없나? 사랑의 대상이 누구든 그 사랑의 이름이 무엇이든, 우리에게는 혼인과 혈연의 개인적인 사정과 무관하게 스스로 가족을 구성하고 내 삶의 동반자를 지정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마땅할 일이다.

사실, 혼인신고서를 쓰지 않고 40년을 살았다는 이유로 아내의 장례를 치러줄 수 없었던 사람의 마음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의 장사법에 따른다면 장례식장에 사실혼 배우자, 친밀한 관계의 친구, 공동체 가족 구성원의 자리는 없다.

얼마 전에, 가까운 친구들의 결혼 발표 자리에 가지 못해 무척 안타까웠던 적이 있다. 심지어 그 자리에서 혼인신고서를 작성하고 친구들이 증인이 되어주었다고 해서 나 역시 증인으로 친구의 앞날을 축복해주지 못한 아쉬움을 말했다가, 한 친구의 비웃음을 샀다.

미혼이라 친구의 결혼을 축하해줄 자격도 없는 자가 되었다.

그렇다. 결혼적령기를 넘겨서 미혼의 상태에 있는 나는 대체로 이런 취급을 받는 것에 꽤 오랜시간 익숙해져 있었다. 애써 농담을 잘 받는 척, 쿨한 척해봤지만 나는 그런 시간 내내 상처받고 아팠다는 걸 시간이 좀 지나서야 알았다.

아무튼.

저 대화 이후 “담보잡을 남정네라도 하나 끌고 오라”는 대사가 이어졌다. 나는 문제의 발언에 인격모독감을 느낀다고 의사를 표현했지만, 상대는 “멘탈이 유리알 같을 때 병원 가면 훨씬 낫다”는 말로 기어이 나를 굴복시키려 했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나의 완벽한 패배였다.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의 대화들이 오갔을 뿐이다.

결혼을 앞둔 그는, 재미있게도, 아내 될 사람에게 한번도 반말을 써 본 적이 없다고, 존대가 훨씬 편하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를 존중하고 언제나 로맨틱한 태도를 잃지 않는, 누가 봐도 유머러스하고 좋은 사람이다. 내 인격은 10인이 모여있는 단톡방에서 처참하게 짓밟혔지만, 나를 짓밟은 사람은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될 것이)다. 그는 사회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수용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유리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런 사회에 편입될 수 있는 사람 역시 기득권층이다. 마음 먹으면 결혼을 할 수 있고, 혼인신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것조차 마음껏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이유도 다양하다.

사회제도는 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기회가 공정해야 하고 혜택은 공평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다양성에 대한 대비도, 변화에 대한 능동적인 태도도 모두 부족하다. 공정과 공평을 바란다면 일단 현재의 제도 안에 들어가야 한다. 제도의 장점을 알고 이용했든 모르고 손해를 보았든 그것은 개인의 역량과 선택에 전적으로 맡겨진다.

나는 이제라도 알아야 한다. 혼인신고는 지금 이 시대에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 역시 이제부터 알아야 한다. 그 중요한 것을 모두가 할 수 있게 되려면, 타인의 행복을 빌어줄 자격을 갖추려면, 더 폭넓은 의미의 가족에 대한 재정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2019. 10.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