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없이 함께 산다는 것

01&91 저 · 북닻 출판

01과 91은 함께 살아요. 부부는 아니에요.
결혼 없이 1년간 함께 살아온 01(男), 91(女)이 전하는 솔직 담백한 ‘동거 일기’

– 독립출판물이었던 이 책을 e-book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이 글을 씁니다.

“책 제목으로 동거라는 단어를 일부러 쓰지 않았어요. 이 사회에서는 동거라는 말이 마치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처럼 부정적인 뉘앙스로 들리거든요. 그 같은 편견들과 인식이 조금이나마 바뀌길 하는 바람이 들었죠. 또한 동거를 앞둔 커플에게 저희 커플이 동거한 경험을 토대로 실질적인 방법들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책을 내게 됐습니다. (01)

“남녀가 함께하는 동거가 여성에게는 더 흠처럼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이해는 하지만 도리어 ‘여자가 손해야’라는 그 말 자체가 틀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저의 선택과 생각은 바뀌지 않아요.” (91)

이들이 말하는 ‘함께 산다는 것’은 “같이 밥을 해먹고, 청소도 하고, 책도 읽고 그렇게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것. 더 많은 순간을 ‘함께’하는 것. 함께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와 나는 청소를 하고 너는 샤워를 하고, 네가 저녁을 차리면 나는 샤워를 하는 것.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나갈 때보다 설레는 것. 돌아오면 항상 네가 있는 곳. 기다리고 있으면 언제나 네가 돌아오는 곳” 이다.

  • 결혼과 출산이 가족의 기준인 시대가, 느리지만 조금씩 저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용기의 기록을 세상에 내보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요. 관심 있는 분들의 독서를 권장합니다!

혼인신고가 이렇게 중요한 줄 몰랐어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편안하게 선택할 수 있는 사회 만들기>라는 거대한 주제가 2019년의 내 삶의 무게를 표현해준다는 데에는 검찰의 거짓말 탐지기도 일말의 의심없이 침묵을 지킬 것이라며 이 프로젝트에 대한 큰 부담감을 친구에게 토로했을 때, 친구는 말없이 이 기사를 보내왔다.

“39년 함께 산 남편이 있는데 무연고 장례라니”

2019-10-13 06:00 연합뉴스

잠시 말이 없던 친구는 일단 읽으라고 했다. 그리고 찾으라고 했다.
뭘 찾냐는 말에 다 찾게 되어 있다는 말을 남기고 자러 간 친구를 향해서 나는.

얘는 왜 또 장례식 타령이래, 지금. 결혼제도에 쏟아지는 이야기만 해도 마감을 못하게 생겼는데.

하다가 기사를 탐독하고 말았다.

39년을 같이 살았던 두 사람. 재혼이라 굳이 혼인신고까지는 하지 않고. 그런데 아내가 죽고 나니, 사실혼 관계로 살아온 이 씨는 연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망진단서를 끊을 수도, 장례 절차를 결정할 수도 없단다. 이걸 정해둔 법을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줄여서 장사법이라고 한단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 2조 16항에서 정한 ‘연고자’의 범위(를 내손으로 직접 찾고 있었고)

수소문 끝에 장례를 치를 방법이라고 찾은 것이 무연고 장례라고 했다.

무연고 장례는 가족이 없거나, 가족이 있더라도 시신 인수와 장례 권한을 포기한 사망자에 대해 지자체가 도움을 주어 치르는 장례이다. 일생을 함께 하고도 법에서 규정하는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내는 연고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가족구성권에 대해서 공부하고 다른 사람들과 그 내용을 공유하면서도, 정작 죽음에까지 전통적인 가족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제도적 제약이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죽음 역시 가족구성권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문제이다. 가족을 구성하는 방식과 그에 따른 형태 역시 다양해지고 있는 현실을 법이 제대로, 제때에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을 해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으면, 비혼주의자로 삶을 살다보면, 우리는 누구나 높은 비율로 죽음 앞에 무연고자가 될 확률을 가지고 있다.

내가 무연고자라니…

하지만!

부부 간이 아닌 인간 관계에 사랑이 없나? 이성 관계 말고는 연애하는 이가 없나? 비혼주의자에게 정녕 인생 친구가 없나? 사랑의 대상이 누구든 그 사랑의 이름이 무엇이든, 우리에게는 혼인과 혈연의 개인적인 사정과 무관하게 스스로 가족을 구성하고 내 삶의 동반자를 지정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마땅할 일이다.

사실, 혼인신고서를 쓰지 않고 40년을 살았다는 이유로 아내의 장례를 치러줄 수 없었던 사람의 마음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의 장사법에 따른다면 장례식장에 사실혼 배우자, 친밀한 관계의 친구, 공동체 가족 구성원의 자리는 없다.

얼마 전에, 가까운 친구들의 결혼 발표 자리에 가지 못해 무척 안타까웠던 적이 있다. 심지어 그 자리에서 혼인신고서를 작성하고 친구들이 증인이 되어주었다고 해서 나 역시 증인으로 친구의 앞날을 축복해주지 못한 아쉬움을 말했다가, 한 친구의 비웃음을 샀다.

미혼이라 친구의 결혼을 축하해줄 자격도 없는 자가 되었다.

그렇다. 결혼적령기를 넘겨서 미혼의 상태에 있는 나는 대체로 이런 취급을 받는 것에 꽤 오랜시간 익숙해져 있었다. 애써 농담을 잘 받는 척, 쿨한 척해봤지만 나는 그런 시간 내내 상처받고 아팠다는 걸 시간이 좀 지나서야 알았다.

아무튼.

저 대화 이후 “담보잡을 남정네라도 하나 끌고 오라”는 대사가 이어졌다. 나는 문제의 발언에 인격모독감을 느낀다고 의사를 표현했지만, 상대는 “멘탈이 유리알 같을 때 병원 가면 훨씬 낫다”는 말로 기어이 나를 굴복시키려 했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나의 완벽한 패배였다.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의 대화들이 오갔을 뿐이다.

결혼을 앞둔 그는, 재미있게도, 아내 될 사람에게 한번도 반말을 써 본 적이 없다고, 존대가 훨씬 편하다고 말했다. 그는 아내를 존중하고 언제나 로맨틱한 태도를 잃지 않는, 누가 봐도 유머러스하고 좋은 사람이다. 내 인격은 10인이 모여있는 단톡방에서 처참하게 짓밟혔지만, 나를 짓밟은 사람은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될 것이)다. 그는 사회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수용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유리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런 사회에 편입될 수 있는 사람 역시 기득권층이다. 마음 먹으면 결혼을 할 수 있고, 혼인신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그것조차 마음껏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이유도 다양하다.

사회제도는 보다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기회가 공정해야 하고 혜택은 공평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다양성에 대한 대비도, 변화에 대한 능동적인 태도도 모두 부족하다. 공정과 공평을 바란다면 일단 현재의 제도 안에 들어가야 한다. 제도의 장점을 알고 이용했든 모르고 손해를 보았든 그것은 개인의 역량과 선택에 전적으로 맡겨진다.

나는 이제라도 알아야 한다. 혼인신고는 지금 이 시대에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 역시 이제부터 알아야 한다. 그 중요한 것을 모두가 할 수 있게 되려면, 타인의 행복을 빌어줄 자격을 갖추려면, 더 폭넓은 의미의 가족에 대한 재정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2019. 10. 23)